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애니메이션/역사 (문단 편집) === [[토에이 애니메이션|토에이 동화]]의 시대 === 전쟁이 끝나자 애니메이션 창작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사람들이 애니메이션에 눈독을 들인 것이다. 1946년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야마모토 사나에, 무라타 야스지, 마사오카 겐조 등 일본 국내 애니메이션 제작자 1백여 명을 모아 '신닛폰동화사'를 설립했다. 마사오카 겐조는 <벚꽃(1946)>, <버려진 고양이 도라쨩(1947)> 등 서정적 작품을 만들었으나 상업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다. 결국 이듬해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한 채 해산되고 주력 멤버들이 '일본만화영화사'를 세웠다. 이후 야마모토와 마사오카가 퇴사하고, 유일하게 남은 무라타가 쇼치쿠를 떠난 세오를 불러서 <임금님의 꼬리(1949)>를 만들게 했으나 배급사 토호가 내용에 딴지를 걸어 미공개되었다. 이후 일본만화영화사는 파산했고, 세오 미츠요는 '세오 다로'로서 만화가가 되고 무라타도 병으로 애니 업계를 떠났다. 반면 야마모토와 마사오카는 1948년 닛폰동화를 세워 야부시타 다이치와 [[모리 야스지]], 후쿠이 에이이치[* 1949년부터 만화가로 전업 후 1952년부터 <까까머리 소년>을 연재해 인기를 얻어 데즈카 오사무의 라이벌로 격상했으나, 1954년 <아카도 스즈노스케> 1화째에 요절했다.] 등을 애니메이터로 합류시켜 준비를 했고, 1952년 토호 관계사들을 흡수해 '니치도영화'로 바꾸고 1955년 토에이의 위탁을 받아 컬러 단편애니 <흥겨운 바이올린>을 제작하고 토에이 교육영화부 산하가 되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전전시대 애니 제작자들은 패전으로 인한 충격과 격변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서서히 퇴장하였다. 전전파가 물러간 빈 자리를 이후 전후파가 채우게 된다. 전후 [[귀축영미|영미문화를 악으로 규정해서]] 금지됐던 서양 영화와 [[미국 애니메이션]]이 극장에 상영되기 시작해서 큰 인기를 얻었다. 프랑스의 《[[왕과 새]]》, [[소련]]의 《[[곱사등이 망아지]]》, 《[[눈의 여왕]]》도 개봉해서 [[데즈카 오사무]]와 토에이 애니메이터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디즈니 최초 장편애니 <[[백설공주(애니메이션)|백설공주]]>가 1950년 일본에 수입되어 전쟁으로 가난에 허덕이던 국민들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었고, 이듬해 나온 <[[밤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선진 기술과 화려한 영상을 내세운 서양의 애니메이션들은 극장에서 상영되며 대중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에 대중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업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하니 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즈음 토에이 실사영화 회사는 주로 칼싸움하는 무협 [[찬바라]], [[야쿠자]] 싸움 영화, [[에로]] 영화 노선으로 극장으로 찾아와서 돈을 뿌려주는 성인 대상의 대중 오락 영화를 주로 만들어 왔는데, 텔레비젼의 방송이 시작되면서 집에서 전기세만 내고 보면 되는 가족 대상 드라마와 오락물이 인기를 얻고, 극장으로 오는 손님은 점점 줄어드는 처지에 놓였다. 그런데 서양의 애니메이션 영화는 남녀노소 가족 단위로 극장에 연일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보고 만화영화가 이렇게나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당시 토에이 사장인 [[오카와 히로시]](大川博)는 매년 1편씩 만들어서 극장 개봉을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만화영화라면 디즈니처럼 현지 언어로 더빙을 한다면 해외로도 수출해서 상영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토에이는 니치도영화를 인수해 '[[토에이 애니메이션|토에이 동화]]'로 새로 출범시켰다. 먼저 미국으로 건너가 디즈니 등지를 둘러보며 선진 애니메이션 제작방식을 배우고 1957년에 도쿄도 [[네리마구]] 오이즈미에 [[콘크리트]]로 된 3층짜리 규모에 냉난방 완비 스튜디오를 준공했다. 초기 멤버는 야부시타를 비롯해 [[모리 야스지]], 후루사와 히데오, 다이쿠하라 아키라 등 니치도 시절 멤버 23명이었으며, 추가로 토에이 시대극 영화를 연출하던 연출가들 중 일부를 데려와 인원을 충원했다.(ex. [[카츠마타 토모하루]]) 제작방식은 디즈니의 1초 24콤마의 1/2인 1초 12콤마였다. 토에이 동화는 《새끼 고양이의 낙서(こねこのらくがき)》([[1957년]] 개봉 [[https://www.youtube.com/watch?v=zRUFGNWZgpQ|보러가기]])와 최초의 장편 극장용 [[컬러]] 애니메이션인 《[[백사전]]》([[1958년]] 개봉)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제작하는 중심축이 된다. 《새끼 고양이의 낙서》는 제목대로 새끼[[고양이]]가 벽에 낙서를 하면서 벌어지는 자그마한 판타지 애니메이션이다. 남의 집 벽에 자동차와 기차를 그려 넣는 고양이와 그걸 바라보는 [[쥐]], 그리고 집주인 [[곰]]이 등장하는 13분짜리 단편이다. 짧은 작품이지만 고양이가 너무 많은 [[차]]와 [[기차]]를 그려 교통이 혼잡해지자 그림 속에 [[경찰]]이 불쑥 나와 교통정리를 하는가 하면, 구경하던 쥐가 고양이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그림 속의 기차를 사고 사라지는 등, 고양이가 그린 이차원의 [[그림]]이 [[4차원]]으로 변하고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교차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5aoOpP7kkHw-BoXRZwP1vEbDNpFs1x93|토에이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 예고편 (1958~1972)]] || 1958년작 《[[백사전]]》[[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E7%99%BD%E8%9B%87%E4%BC%9D|예고편]]은 중국 민화를 소재로 한 러브스토리 애니메이션이다. 중국 [[송나라]] 허선이 귀여워했던 백사가 아리따운 여인인 백랑으로 환생하여 만나게 되는데 이 둘의 파란만장한 인연이 박진감 넘치게 진행된다. [[베네치아]] 아동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으로서 일본 애니 매니아들 사이에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이고, [[코타베 요이치]], [[미야자키 하야오]] 등 애니메이터 지망자를 양성시켰다. 이후, 토에이 동화는 《소년 [[사루토비 사스케]]》, 《[[서유기]]》, 《안쥬와 즈시오마루》 등 매년 꾸준하게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제작 개봉했다. [[디즈니]]가 서양의 [[전래동화]]를 소재로 삼은 것에 대항해서, 토에이는 '''동양의 디즈니'''를 목표로 아시아의 소재를 영화화했다. 초창기 토에이는 디즈니를 본받아 실사 영화처럼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중시했고, 스토리는 일본 고전놀이 '스고로쿠' 방식 및 왕복 전개[* 전개 방식은 주인공이 뜻을 세워 모험을 시작해 여러 마을이나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목적을 달성하고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를 차용했으며 제작방식은 [[오오츠카 야스오]]나 후루사와 히데오 같은 유력 애니메이터들에게 맡겨 경쟁을 유도하며 연출자가 체크토록 했다. 토에이는 TV 애니메이션이 방송되기 시작한 1963년부터는 A급 대작영화와 TVA 소품(20분) 몇 편을 동시상영했고, 이것이 호평을 얻어 '[[토에이 만화 축제|토에이 만화대행진'(이름은 계속 바뀐다]])라는 이벤트 형식으로 방학기간에 상영하고 어린이 관객을 불러모았다. 경쟁 영화사인 [[토호]]도 같은 형식으로 [[고지라]] 시리즈와 특촬, TVA 소품을 엮여서 [[도호 챔피언 축제]]라는 이벤트로 상영하면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토에이동화의 경영상황은 모회사 토에이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을 정도로 재정난에 시달렸고, 당시 애니의 지위는 실사영화의 들러리이며 아직 인기 주인공이 배출되지 않았다. 수익이 나는 분야는 애니메이션을 이용한 광고물 제작이었다. 당시로서는 신선한 애니메이션을 이용한 광고에 일본 기업의 주문 발주가 쏟아졌고, 300명의 직원에서 200명은 이러한 10초 짜리 30초 짜리 광고 영상 제작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오쿠야마 레이코]]의 회상에 의하면, 광고 제작팀으로 가는 인원은 신입 동화맨, 그리고 그림 실력이 없는 사람, 자신처럼 노조활동을 해서 윗사람에게 밉보여서 좌천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는 엘리트 요원이 참가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영화]]는 2차 시장 상품인 가정용 [[비디오테이프]]라든가 [[DVD]]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고, 관련 캐릭터 상품도 개발되지 못한 상황에서 극장 흥행에만 의존하던 시절인데도, 지금처럼 [[멀티플렉스]]가 있어서 상영 스크린이 많은 것도 아니고, 도쿄나 오사카 등 대도시에서 먼저 개봉하고 이윽고 지방의 소도시를 옮겨가면서 프린트한 개수가 한정된 필름을 돌려가며 틀어주는 상영 방식이었다. [* 그래서 지방의 시골에 까지 오면 그 필름은 너무 많이 틀어대서 필름 상태가 손상이 가서 화면에서 빗줄기가 내리곤 했다.] 관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도 일반적인 실사 영화에 비해 제작비가 워낙 많이 들어가서 들어간 제작비를 회수를 못하는 상태였다. [[디즈니]]처럼 전세계적으로 배급을 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어서 국내 관객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극장용 영화는 만들기만 하면 적자를 보는 상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